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주 대학살 (문단 편집) == 민심에 대한 영향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조조에 대한 민심은 나쁜 편이었다. 우선 위진남북조 당대에는, 조조에 대한 민심이 나빴다고 볼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손권, 장제[*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등 삼국지 인물들의 언급을 통해 좋은 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저들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둔전제, 강제이주 같은 정책 때문에 조조는 기본적으로 민심이 좋기 힘들었다. 민간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북송 이후로 민간에서 조조의 이미지는 좋았던 적이 없었다. 조조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이 나관중의 영향이라는 설, 성리학의 영향이라는 설, 금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남송에서 유비에게 동질감을 느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이는 조조의 이미지가 더욱 악화된 것에 대한 설이지 근본적으로 왜 조조의 이미지가 나빠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으며, 성리학, 남송의 설은 민간보다는 식자층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나빠진 이유에 더 가깝다. 특히 북송 시대의 인물인 소동파도 이미 민가에서는 유비를 좋아하고 조조를 싫어하였다고 전하기 때문에 조조의 이미지가 나관중의 영향, 성리학의 영향으로 악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전부터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민가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아주 가난하더라도 조금씩 돈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삼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 유현덕이 패하여 어려움에 처하면 눈물을 흘리다가,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만인이 아주 즐거워한다.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영향은 백 대를 지나도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塗巷中小兒薄劣,其家所厭苦,輒與錢,令聚坐聽說古話。至說三國事,聞劉玄德敗,顰蹙有出涕者;聞曹操敗,即喜唱快。以是知君子小人之澤,百世不斬。). >소동파(蘇東坡)의 지림(志林) 권1, 도항소아청설삼국어(塗巷小兒聽說三國語)에서 또한 남조 유송에서 편찬된 《[[세설신어]]》 같은 문헌을 통해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 책은 5세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남북조시대의 민심을 확인하기에는 소식의 지림보다 훨씬 적합하다. 《세설신어》는 단순한 소설집이나 루머 모음집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에 대하여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추측하는 데 이용되는 귀중한 사료이므로, 남북조시대 사람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세설신어는 후대에 소설가(小說家) 서적으로 분류되었다. 기본적으로 소설가는 길거리나 마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하던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수집한 자들이 지배층이긴 하나 민중의 생각을 어느정도 담고있다고 봐야한다. 그렇다고 위진시대, 그리고 남북조시대에 민간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나빴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먼저 소동파는 11세기의 인물로 태어난 시점이 조조가 사망한 220년과 800년 이상 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800년 이후 민간의 여론을 가지고 그 이전에도 조조의 이미지가 나빴다고 소급적용하는 것은 억측이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은 세설신어이다. 세설신어에서도 민중들이 조조를 싫어하는 장면이 나오면 소식이 묘사한 것처럼 민중에서 조조를 미워하는 행동이 그 이전부터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조조가 등장하는 세설신어의 일화들이다. >禰衡被魏武謫為鼓吏,正月半試鼓。衡揚枹為漁陽摻檛,淵淵有金石聲,四坐為之改容。孔融曰:「禰衡罪同胥靡,不能發明王之夢。」魏武慚而赦之。 >---- >「언어편」 中 >南陽宗世林,魏武同時,而甚薄其為人,不與之交。及魏武作司空,總朝政,從容問宗曰:「可以交未?」答曰:「松柏之志猶存。」世林既以忤旨見疏,位不配德。文帝兄弟每造其門,皆獨拜床下,其見禮如此。 >---- >「방정편」 中 >小庾在荊州,公朝大會,問諸僚佐曰:「我欲為漢高、魏武何如?」一坐莫答,長史江虨曰:「願明公為桓、文之事,不願作漢高、魏武也。」 >---- >「규잠편」 中 >楊德祖為魏武主簿,時作相國門,始搆榱桷,魏武自出看,使人題門作「活」字,便去。楊見,即令壞之。既竟,曰:「門中『活』,『闊』字。王正嫌門大也。」 >---- >「첩오편」 中 >人餉魏武一桮酪,魏武噉少許,蓋頭上題「合」字以示眾。眾莫能解。次至楊脩,脩便噉,曰:「公教人噉一口也,復何疑?」 >---- >「첩오편」 中 >魏武嘗過曹娥碑下,楊脩從,碑背上見題作「黃絹幼婦,外孫虀臼」八字。魏武謂脩曰:「解不?」答曰:「解。」魏武曰:「卿未可言,待我思之。」行三十里,魏武乃曰:「吾已得。」令脩別記所知。脩曰:「黃絹,色絲也,於字為絕。幼婦,少女也,於字為妙。外孫,女子也,於字為好。虀臼,受辛也,於字為辭。所謂『絕妙好辭』也。」魏武亦記之,與脩同,乃歎曰:「我才不及卿,乃覺三十里。」 >---- >「첩오편」 中 >魏武征袁本初,治裝,餘有數十斛竹片,咸長數寸,眾云並不堪用,正令燒除。太祖思所以用之,謂可為竹椑楯,而未顯其言。馳使問主簿楊德祖。應聲答之,與帝心同。眾伏其辯悟。 >---- >「첩오편」 中 >何晏七歲,明惠若神,魏武奇愛之。因晏在宮內,欲以為子。晏乃畫地令方,自處其中。人問其故,答曰:「何氏之廬也。」魏武知之,即遣還。 >---- >「숙혜편」 中 >魏武將見匈奴使,自以形陋,不足雄遠國,使崔季珪代,帝自捉刀立床頭。既畢,令間諜問曰:「魏王何如?」匈奴使答曰:「魏王雅望非常,然床頭捉刀人,此乃英雄也。」魏武聞之,追殺此使。 >---- >「용지편」 中 >魏武帝崩,文帝悉取武帝宮人自侍。及帝病困,卞后出看疾。太后入戶,見直侍並是昔日所愛幸者。太后問:「何時來邪?」云:「正伏魄時過。」因不復前而歎曰:「狗鼠不食汝餘,死故應爾!」至山陵,亦竟不臨。 >---- >「현원편」 中 >桓公入洛,過淮、泗,踐北境,與諸僚屬登平乘樓,眺矚中原,慨然曰:「遂使神州陸沈,百年丘墟,王夷甫諸人,不得不任其責!」袁虎率而對曰:「運自有廢興,豈必諸人之過?」桓公懍然作色,顧謂四坐曰:「諸君頗聞劉景升不?有大牛重千斤,噉芻豆十倍於常牛,負重致遠,曾不若一羸牸。魏武入荊州,烹以饗士卒,于時莫不稱快。」意以況袁。四坐既駭,袁亦失色。 >---- >「경저편」 中 >魏武少時,嘗與袁紹好為游俠,觀人新婚,因潛入主人園中,夜叫呼云:「有偷兒賊!」青廬中人皆出觀,魏武乃入,抽刃劫新婦與紹還出,失道,墜枳棘中,紹不能得動,復大叫云:「偷兒在此!」紹遑迫自擲出,遂以俱免。 >---- >「가휼편」 中 >魏武行役,失汲道,軍皆渴,乃令曰:「前有大梅林,饒子,甘酸,可以解渴。」士卒聞之,口皆出水,乘此得及前源。 >---- >「가휼편」 中 >魏武常言:「人欲危己,己輒心動。」因語所親小人曰:「汝懷刃密來我側,我必說心動。執汝使行刑,汝但勿言其使,無他,當厚相報!」執者信焉,不以為懼,遂斬之。此人至死不知也。左右以為實,謀逆者挫氣矣。 >---- >「가휼편」 中 >魏武常云:「我眠中不可妄近,近便斫人,亦不自覺,左右宜深慎此!」後陽眠,所幸一人竊以被覆之,因便斫殺。自爾每眠,左右莫敢近者。 >---- >「가휼편」 中 >袁紹年少時,曾遣人夜以劍擲魏武,少下,不箸。魏武揆之,其後來必高,因帖臥床上。劍至果高。 >---- >「가휼편」 中 >魏武有一妓,聲最清高,而情性酷惡。欲殺則愛才,欲置則不堪。於是選百人一時俱教。少時,還有一人聲及之,便殺惡性者。 >---- >「분견편」 中 조조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고 볼 수 있는 일화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중에서 조조를 싫어했다는 근거로 사용하기엔 부족한 일화들이다. 세설신어에 수록된 조조 관련 일화들 가운데 대표적인 일화가 '몽중살인'이다. 하지만 일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조조를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과는 궤가 다른 일화이다. 해당 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조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자는 도중에 누가 가까이 오면 그 사람을 공격하고도 눈치채지 못하니 주변 사람들은 조심하도록 하라'라 경고를 하였고, 한번 자는 척을 하며 누가 가까이 왔을 때 그 사람을 공격해 죽이자, 그 이후로는 조조 주변 사람들 중에 조조가 잘 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일화가 수록된 편의 이름이 가휼(假譎)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화의 핵심 내용은 조조의 기만적이고 속임수 많은 성격이다. 자는 도중 타인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잘 때 가까이 온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자는 척'''[* 진짜로 자다가 사람을 죽인 일화가 아니다.]을 하다가 가까이 온 사람을 죽여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조조는 자는 도중에 가까이 온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조조의 속임수, 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긍정적인 일화는 아니지만 민중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담겨있는 일화라 보기는 어렵다. 또다른 일화로는 조조군이 행군하던 중 급수로를 찾지 못해 군사들의 갈증이 심각해지자 조조는 '저 앞에 매실숲이 있다!'라 거짓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조조군은 입 안에 침이 고여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유부녀 보쌈으로 널리 알려진 원소와의 일화에서도 원소가 구덩이에 빠지자 조조는 '범인이 여기에 있다'라 거짓말을 했고 화들짝 놀란 원소가 구덩이에서 뛰쳐 나왔기에 둘 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위의 일화들은 '민중에서 형성된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세설신어의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민중에서 형성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 이미지가 '''학살 때문에 형성'''되었는지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다. 둔전제, 강제이주 같은 정책이 비록 조조 세력을 탄탄히 하는 것에는 큰 도움을 주었으나 백성들의 마음을 잃기는 쉬운 정책이었다. 학살을 제외하고서도 민중들 사이에서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될 사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 지역에서 민심을 잃었다고 다른 모든 지역의 민심들도 같이 이반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반례가 [[항우]]이다. 항우는 신안에서 진나라 병사 20만을 갱살했고,[* 규모는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적어도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 혹은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에서는 20만이 갱살되었다고 전해졌을 것이다.] 함양을 불태우고,[* 이 두가지 사례는 진나라가 공공의 적이었다고 반론할 수는 있다.] 제나라를 공격하며 성양을 도륙하고, 팽월과 싸우며 양(梁)나라 땅을 초토화하는 등 조조에 못지않게, 어쩌면 조조를 뛰어넘을 정도의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으나, 항우의 본거지인 노(魯) 땅[* 항우의 수도가 팽성이긴 했으나 항우가 처음으로 봉해진 곳은 노(魯)이다. 유방이 패공이 될 때 항우는 노공이 되었다.]의 백성들은 유방과 그 부하들의 군대에게 포위되고서도 항우가 의심의 여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직 6국의 정체성이 남아있어서 타국 백성들을 도륙한 것이 초나라 사람들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6국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이후에는 오히려 심리적인 거리가 멀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에는 평원, 임치, 즉묵, 거 등 제나라 소속이었던 여러 지역이 모두 '제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나라가 망하고 그 정체성이 사라진 후에는 동래군 사람, 성양군 사람, 평원군 사람, 제국 사람 이런 식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해보자. 과거 제나라라는 정체성이 있었을 때는 거현, 성양군 일대가 타국의 군대에 도륙당했을 때 '타국이 제나라를 침공했다'라 인식되었겠지만, 정체성이 사라진 후에 어떤 군벌이 거현, 성양군 일대를 도륙했을 경우에 동래군, 평원군 등 옛 제나라 땅에서는 '우리 이웃인 성양군 사람들이 도륙당했다'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른 지역의 백성들이 조조에게 학살당한 서주 백성들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조가 민심을 잃은 이유가 서주대학살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근거가 부족하다. 2.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로 다른 지역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 3. 학살로 전국의 민심을 잃었다 하더라도 후대 백성들이 조조를 싫어하는 것이 당대에 생긴 악감정의 연속이라 볼 근거가 부족하다.[* 학살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악감정이 희석되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다시 악감정이 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 정리한 세 문장은 조조가 학살로 '''민심을 잃지 않았다'''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민심을 잃었다'''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라는 것이다. 간혹 '''조조는 서주대학살 때문에 민심을 잃어 통일하지 못했으니 서주대학살은 조조 인생 최대의 실책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의 주장이 참이 되기 위해선 첫째, 조조가 통일에 실패한 이유는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고, 둘째, 조조가 민심을 잃은 이유는 서주대학살 때문이어야 한다. 허나 조조가 통일에 실패한 이유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부터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고,[* 조조가 적벽에서 승리했더라면 통일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견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면 조조가 통일에 실패한 이유는 적벽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을 격파할 정도의 능력이 안되었기 때문이지 민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논점은 유비가 끝끝내 조조를 거부하고 그의 러브콜을 죄다 씹은 이유가 서주 대학살을 위시한 조조의 인성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거나, 적벽대전이 제갈량이 서주 때문에 조조에게 임관하지 않은 것으로 인한 나비효과였다거나 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말인데,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근거가 부족해서 2차 창작에서 재해석할때나 꺼내볼법한 관점이지 '정설'이 되기에는 힘든 가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주대학살 때문에 민심을 잃었는지도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결국 위의 주장은 근거가 불충분한 주장인 것이다. 비슷하게 '''위나라는 조조의 서주대학살 때문에 민심을 잃어 단명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역시 근거가 불충분하다. 위나라가 사마씨한테 찬탈당한 이유가 민심 때문이라 볼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찬탈당한 원인이 민심을 얻지 못한 것이라면 민심을 얻었다면 찬탈당하지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군부를 친사마씨가 차지하고 대부분의 사족들이 사마씨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지지가 정권 유지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을까? 민심을 얻었다 가정하더라도 위나라의 역사 40여년은 백성들에게 황제=조씨라는 인식을 남기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씨 부흥 운동, 혹은 반사마씨 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조조가 대학살로 민심을 잃지 않았다 해서 조조의 후손들이 민심을 잃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결국 서주대학살과 민심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것은 학살당한 사람의 부모형제친척들이 조조를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서주의 백성들은 조조 생전에 조조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 뿐이다. 나머지는 현존하는 사료로는 알 수 없는 영역들이다. 애초에 고대의 민심이란 것 자체가 알기 쉬운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